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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구 광희동, 고층 빌딩과 오래된 주택들이 뒤엉킨 풍경 사이로 묘한 기운이 흐른다. ‘광희문’이라 불리는, 조선시대 도성의 남소문이자 ‘시구문’이라는 이름을 간직한 이 문은 한때 삶과 죽음이 교차하던 장소였다. 조용히 그 앞을 지나 걷다 보면, 문득 기름 냄새가 퍼지는 방향으로 고개가 돌아간다. 익숙하면서도 어딘지 색다른 향. 참기름일까, 들기름일까.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흔히 시장에서 맡는 고소함과는 다른, 조금 더 깊고 단정한 냄새다. 마치 잘 내려진 핸드드립 커피처럼 절제된 고소함. 향을 따라가면 나타나는 곳, 바로 도시형 방앗간 ‘정용오일’이다.

겉으로 보기엔 여느 트렌디한 브런치 카페 같다. 콘크리트 질감이 살아 있는 외벽, 유리문, 그리고 안쪽으로 비치는 고운 빛깔의 병들이 진열된 모습은 전혀 기름집이라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서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공간은 참기름과 들기름을 짜는 기계들과, 방금 짜낸 오일을 병에 담는 사람들, 고요한 긴장감 속에서도 분주히 움직이는 손길들로 가득하다. 이곳을 만든 이는 박정용 대표, 올해 쉰여섯이다. 사실 그는 원래부터 기름을 짜던 사람은 아니었다. 국내 굴지의 화장품 회사에서 ‘오일’을 연구하던 연구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왜 참기름은 늘 한 가지 방식으로만 짜지? 왜 향이나 질감에 차이를 두는 시도가 없을까?"

그는 이 호기심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수십 년을 일군 안정된 직장을 과감히 그만두고, 기름 짜는 기계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고온으로 볶은 뒤 압착해 짜내는 전통 방식이 아니라, ‘저온 압착’이라는 개념을 들여왔다. 고소함은 줄어들 수 있지만, 원재료 본연의 풍미와 영양은 살아있게 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그 시작은 순탄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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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제품을 내놓았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이게 무슨 참기름이냐”, “고소한 맛이 없다”, “기름 같지 않다”는 평가가 이어졌다. 대형마트나 전통시장에서는 전혀 팔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기름은 기름다워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 그는 셰프들을 찾아다녔다. 미쉐린 스타 레스토랑의 주방장들에게 시음을 요청하고, 요리에 직접 사용해보도록 설득했다.

그러던 중, 한 프렌치 레스토랑 셰프가 그의 오일을 사용해보고 말한다. “이건 참기름이 아니라, 하나의 ‘오일’이다. 요리에 감칠맛을 더하는 조연이 아니라, 이 자체로 주연이 될 수 있다.” 그 말 한마디가 박 대표에게는 큰 전환점이 되었다. 이후 유명 레스토랑에서 그의 오일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입소문을 타면서 도쿄, 홍콩, 뉴욕에서도 관심이 이어졌다.

정용오일의 참기름과 들기름은 크게 세 가지 방식으로 나뉜다. 볶지 않고 짜는 ‘생압착’, 약하게 볶은 후 짜는 ‘미디엄 로스트’, 전통적인 고소함을 살린 ‘다크 로스트’. 마치 커피처럼 볶음 강도에 따라 맛이 달라지고, 요리 종류에 따라 어울리는 오일도 달라진다. 대표는 “올리브오일에는 수십 가지 종류가 있는데, 왜 참기름은 하나여야 하냐”고 반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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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앗간 내부는 온도와 습도가 정밀하게 조절된다. 모든 참깨와 들깨는 직접 계약 재배한 국내산만을 쓰며, 세척, 건조, 선별, 압착, 병입까지 모든 과정이 한 공간에서 이뤄진다. 소비자들은 이 모든 과정을 투명하게 볼 수 있도록 유리 벽 너머로 제조 장면을 볼 수 있다. 이곳에선 ‘기름’이 아닌 ‘오일’을 만든다. 단지 볶아낸 향이 아니라, 자연에서 가져온 식물의 에센스를 짜내는 작업이다.

박 대표는 지금도 매일 아침 기름 냄새로 하루를 시작한다. 그리고 그 향을 맡으며 생각한다. “참기름 한 방울이 바꿀 수 있는 게 얼마나 많을까.” 음식의 맛은 물론, 삶의 방향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광희문 앞, 죽음을 넘어 생명이 이어지던 그 길목에서, 박정용 씨는 전통을 새롭게 해석하며 미래를 짜내고 있다. 그리고 그 오일 한 병에는 그가 걸어온 시간, 그리고 한국의 맛이 담겨 있다. 참기름과 들기름, 더 이상 구수한 향기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오일의 세계. 그 세계를 일궈가는 한 사람의 손끝에서, 오늘도 느리지만 단단한 혁신이 만들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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